최고의 디자이너들이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을 고집하는 이유
평범한 청바지, 티셔츠와 스니커즈. 언뜻 패션에 아무 관심 없는 사람의 옷차림처럼 보이는 이 조합은 패션계를 쥐락펴락하는 디자이너들이 가장 선호하는 룩입니다. 마티유 블라지, 조나단 앤더슨, 빅토리아 베컴은 물론 2010년대 중반 맥시멀리즘의 부흥기를 이끌었던 알레산드로 미켈레 역시 티셔츠, 청바지와 스니커즈를 고집하죠.
리 맥퀸의 어시스턴트로 커리어를 시작해 지금은 지방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맡고 있는 사라 버튼은 셔츠, 청바지, 흰 컨버스를 유니폼처럼 착용합니다. 프레피 스타일의 대부 타미 힐피거는 2016년 <타임> 매거진 인터뷰에서 “대략 셔츠 50벌, 치노 팬츠 50벌, 청바지 50벌과 흰 스니커즈 25켤레를 갖고 있다”며 자신이 지루하게 옷을 입는 편이라고 얘기한 적 있고요. 조나단 앤더슨은 캐주얼한 톱에 청바지 조합을 고집하는 이유를 밝혔는데요. 2020년 인터뷰 중 “환상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중립을 지켜야 한다”며 평소 검은색과 흰색, 회색 유니클로 티셔츠에 청바지를 매치한다고 말했습니다.
잠시 시계를 10월 초로 돌려봅시다. 마티유 블라지의 샤넬 데뷔 컬렉션 피날레를 장식한 인물은 모델 아와르 오디앙(Awar Odhiang)이었습니다. 오디앙이 환하게 웃으며 무대 중앙에서 빙글빙글 돌자 블라지가 뛰쳐나와 그녀를 껴안았죠. 색색의 깃털 장식이 달린 스커트를 입고 있던 오디앙과 달리 블라지는 헐렁한 셔츠와 스트레이트 데님에, 오래된 나이키 스니커즈를 신고 있었습니다. 소탈한 차림으로 가장 화려한 무대에 오른 주인공은 ‘패션 구도자’처럼 느껴졌죠.
디자이너에게는 창의성이 요구됩니다. 새로운 뭔가를 만들어내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해야 하고요. 그렇기 때문에 디자이너들은 정신적 ‘명료함’이 필요합니다. 그들이 매일 아침 아무 고민 없이 반복할 수 있는 ‘개인의 유니폼’을 구성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단순하게 차려입으며 마음을 비우고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는 거죠. 그것도 아니면 1년 365일 옷과 씨름하는 그들이 직접 옷을 입을 때만큼은 패션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은 걸 수도 있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스타일에 대해 너무 깊이 생각하는 것은 쿨하지 못합니다. 너무 애쓴 티가 나는 룩만큼 멋없는 것도 없으니까요. ‘최고의 디자이너들이 티셔츠와 청바지만 입으니, 여러분도 그렇게 하세요’라고 강요하는 것도 아닙니다. 매일 다른 옷을 입지 않아도 충분히 스타일리시할 수 있다고 말하는 거죠. 자신의 라이프스타일, 취향과 어울리는 스타일링 공식을 확립한 뒤 그 안에서 조금씩 변주해보세요. 잘 몰랐던 패션의 또 다른 매력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