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으로 가능한 모든 것, 거침없는 선구자
얼마 전 ‘친절한 도슨트’에서 언급한 글래드스톤 전시에 이어, 이번에도 꼭 기억해야 할 도예 전시를 소개합니다. 현재 젊은 도예 작가들의 활약이 이를테면 신상호 작가 같은 선구자 덕분에 가능했던 게 아닐까 싶거든요. 그런 점에서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2026년 3월 29일까지 열리는 <신상호: 무한변주>전 역시 도예의 편견을 깨뜨릴 뿐만 아니라 무한한 자유를 느낄 수 있는 자리입니다. 신상호 작가는 다양한 도자 형식과 탁월한 기술력으로 한국 현대 도예를 이끌어왔습니다. 그의 작업 세계가 더욱 특별한 건 현대사의 흐름 속에서 사회와 미술의 변화를 도외시하지 않았기 때문인데요. 1960년대에 전통 도예의 길로 들어선 그는 흙에 파묻혀 도예 자체에 골몰하기보다는 시대 변화와 내면의 탐구에 집중했고, 이를 동력으로 도자의 경계를 확장했습니다.
이번 전시 제목인 ‘무한변주’는 신상호 작가의 이러한 실험 정신과 탐구 정신, 그리고 이를 통해 구현한 다채로운 흙의 세계를 직설적으로 시사합니다. 전통의 기초를 부지런히 갈고닦은 그는 1988년 서울올림픽을 전후한 국제화의 물결 속에서 그 규범을 과감히 넘어섰고, ‘도자 조각’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습니다. 21세기 들어서는 한발 더 나아간 ‘도자 설치’와 ‘건축 도자’ 작업을 시도하며, 미술과 건축의 경계를 허물었습니다. 그런 그가 2020년대에 이르러 선보인 ‘도자 회화’에서 흙을 전복적으로 사유할 수 있었던 건 아마도 일생을 관통한 도전 정신 덕분이었을 겁니다. 말하자면 신상호 작가에게 흙은 가장 친근한 매체인 동시에 가장 뛰어넘고 싶은 대상(재료)이 아니었을까요.
이번 전시는 지난 60여 년에 걸친 신상호 작가의 이러한 여정을 차근차근 펼쳐 보입니다. 재현의 대상이 아닌 현대적 맥락에서 전통을 재해석해야 한다는 개념으로 인식한 초기, ‘한국 도예의 국제화’라는 슬로건을 작업에도 도입해 서구와 아프리카를 넘나드는 실험에 매진하던 시기, 도자와 건축을 결합해 도자의 다양한 응용 가능성을 탐색하던 구조적 실험의 시기, 옛 물건에서 받은 내밀한 영감으로 고유한 상상력을 구축하던 시기, 그리고 ‘흙으로 그린다’는 개념을 도자와 조각, 회화의 통합을 통해 현실화한 최근까지… 한국 도자 예술의 역사를 다시 쓴 신상호의 거침없던 실험적 행보를 함께하다 보면, 누구나 예술의 역동성을 실감할 수 있을 겁니다.
태생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작품들을 둘러보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모든 예술가들의 궁극적인 바람은 어쩌면 자신의 피와 살이 된 미술의 장르 및 경계를 도리어 허물어뜨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흙은 지난 수천 년 동안 미술 재료로 쓰여왔지만, 신상호 작가처럼 흙을 자유롭고 열린 태도로 만진 예술가들 덕분에 도예가 여전히 생명력을 유지한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올 연말연시, 어쩌면 춥고 스산하겠지만, 적어도 이 전시장 안에서는 엄청난 열기를 느낄 겁니다. ‘아프리카의 꿈-토템’이라는 제목의 작품 앞에서 저는 아프리카의 꿈뿐 아니라 평생 흙을 만진 한 나이 든 예술가의 꿈을 만나고는 내내 따뜻했습니다.